왕조시대 군주처럼 사면권 남발…적폐 대거 부활

'세월호 유족 불법 사찰' '경찰 댓글 공작'도 포함



김기춘, '블랙리스트' 징역 2년에도 재상고 포기
김관진, '댓글 공작' 징역 2년…돌연 재상고 취하
특사 발표 코앞에 두고 사전 교감 '약속 사면' 의혹


MBC 김장겸·안광한‧백종문·권재홍까지 '은사'

 

거부권과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지만 삼권분립을 침해하고 사법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등 여러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고 공명정대하게 행사해야 한다. 이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왕조시대의 절대군주라도 되는 듯 본인과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식 이하의 행위도 거리낌 없이 벌여온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에 또 사면권을 마음껏 남용했다. 노골적인 '우리편 챙기기'이자 '촛불 지우기'로서 '사면 농단'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마이동풍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부정‧비리 전과자들 가운데 사면복권이 안 된 인사를 찾는 게 오히려 어려워진 실정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24일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6-1부(원종찬 박원철 이의영 부장판사)는 이날 김 전 실장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2024.1.24. [연합]
 
 

윤 대통령은 6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특별사면·특별감형·특별복권 및 특별감면조치 등에 관한 안건'을 재가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980명을 대상으로 단행된 특별사면에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과거 보수정권의 비리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법무부 장관 직무대행인 심우정 법무차관은 "전직 주요 공직자를 기존 사면과의 균형 등을 고려해 추가 사면하고 여야 정치인, 언론인 등을 사면 대상에 포함해 갈등을 일단락하고 국민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고 발표했다.

김기춘 전 실장의 경우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예술가 및 단체들에 관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건 작성을 지시하고 이를 토대로 정부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다가 2심에선 1급 공무원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 등이 추가로 인정돼 징역 4년을 받았다. 그런데 대법원이 2020년 1월 직권남용죄에 관한 법리 오해와 심리 미진을 이유로 서울고법에 사건을 돌려보내면서 지난달 24일 파기환송심에서는 형량이 절반이나 깎여 징역 2년이 선고됐다.

김 전 실장이 재상고 기한인 지난달 31일까지 서울고법 파기환송심 재판부에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으면서 형이 확정됐으나 이번 사면으로 잔여 형기를 그마저도 면제받고 복권됐다. 김 전 실장은 보수우익 단체들을 불법 지원한 '화이트리스트' 혐의로도 징역 1년의 실형이 확정됐지만 지난해 신년 특사를 통해 복권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이 5일 오후 대구 수성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린 '박근혜 회고록 출간기념 저자와의 대화'가 끝난 뒤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2024.2.5 [연합]
 

김관진 전 장관은 2012년 총선과 대선 전후 군 사이버사령부 부대원에게 당시 정부와 여권을 지지하고 야권을 비난하는 댓글 9000여 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군 댓글 공작' 사건으로 지난해 8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장관은 대법원에 재상고했다가 돌연 지난 1일 재상고 취하서를 접수해 형이 확정됐는데 불과 5일 뒤에 사면복권 대상이 됐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김 전 실장과 김 전 장관이 특사 발표를 코앞에 두고 대법원 상고를 포기 또는 취하한 것은 사전에 윤석열 정부와 다 얘기가 됐거나 교감한 끝에 이뤄진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이른바 '약속 사면' 의혹이다. 권순정 법무부 검찰국장은 브리핑에서 '김 전 장관은 변호인도 징역형이 확정되는 걸 만류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직접 재상고 취하를 요청했다. (사면을) 미리 알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아닌가'라는 기자 질문을 받자 "과거에도 형이 확정되고 단기간에 사면이 이뤄진 전례가 있다"며 "교감이나 약속은 있을 수 없다. 사면심사위원회는 외부 위원들로 다수 구성된다"고 답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김 전 실장과 함께 기소됐던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사면 명단에서 빠졌다. 조 전 수석은 2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역시 파기환송심을 통해 징역 1년 2개월로 감형됐으며 형기를 모두 채워 잔여 형기는 없는 상태다. 조 전 수석이 제외된 이유를 취재진이 묻자 권순정 검찰국장은 "사면은 사면권자인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필요성과 국민 통합의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정치적 결단"이라며 "통상 사면 대상이 왜 아닌지는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순정 법무부 검찰국장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4년 설 특별사면 기자회견에 참석해 세부 사항 설명을 위해 단상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

 

이 밖에 세월호 유족을 불법 사찰한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이 확정된 김대열·지영관 전 기무사령부 참모장도 잔형 집행 면제 및 복권 대상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 시절 '경찰 댓글 공작' 사건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 확정된 서천호 전 부산경찰청장은 형 선고 실효 및 복권 대상이 됐다.

심지어 노동조합 활동에 부당 개입한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MBC 전직 임원들까지 윤 대통령의 은사를 입었다. 김장겸·안광한 전 사장은 형 선고 실효 및 복권, 백종문·권재홍 전 부사장은 복권 대상이다. 이에 대해 권순정 검찰국장은 "30년 이상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언론 발전에 기여한 점, 국정농단이나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된 분들에 대한 형평성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여야 정치인 7명도 사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권에서는 10억 원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7년이 확정된 이우현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국회의원을 비롯해 김승희 전 의원, 이재홍 전 파주시장, 황천모 전 상주시장이 잔형 집행 면제 혹은 복권됐다. 구색 맞추기용으로 끼워 넣은 듯한 인상을 주는 야권 인물로는 불법 정치자금 혐의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던 심기준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기춘 전 의원, 전갑길 전 광산구청장이 포함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생으로 회사 자금 횡령 등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한 혐의로 역시 실형을 받았던 구본상 LIG 회장 등 경제인 5명도 복권됐다. 법무부는 나머지 경제인 3명이 누구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김태우 강서구청장 후보가 2023년 10월11일 서울 강서구 캠프사무소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입장을 밝힌 뒤 떠나고 있다. [연합]

 

이번 특별사면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네 번째다. 앞선 세 차례 특사에서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위시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최윤수 전 국정원 2차장,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과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 안봉근·이재만·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우병우 전 민정수석,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배득식 전 기무사령관, 연제욱·옥도경 전 사이버사령관, 소강원 전 기무사 참모장,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 등 비리‧적폐 인사들을 대거 구제해줬다.  < 김호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