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개입이나 판사 사찰 등 주요 혐의는 모두 무죄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으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5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

 

법원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사법농단’의 몸통으로 지목하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지만, 재판 개입이나 판사 사찰 등 주요 혐의는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문제 소지가 있다고 본 일부 혐의에 대해서도 ‘법이 금지한 행위지만 사법행정을 위한 정당행위’, ‘부적절하지만 형사처벌할 정도는 아님’ 등의 논리로 죄가 없다고 봤다.

10차례 재판 관여 인정…하지만 ‘죄 아니다’ ‘실체 없다’

임 전 차장의 1심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형사처벌에 이르지 못했지만 명시적으로 인정된 재판개입(재판관여행위)은 모두 10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당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 판결 이유 수정 요청 △홍일표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형사사건,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인의 형사사건, 서기호 전 통진당 의원 행정소송 등 재판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한 행위 등이다.

이미 앞선 재판에서 ‘재판개입’이라고 인정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3건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2건 △비위 법관이 연루된 형사사건 선고 연기를 요청한 행위도 포함된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지 못한 이유는 오직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어서 남용할 수 없다’는 법리뿐이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직권남용죄는 구성요건이 추상적이라 법원이 해석하기 나름”이라며 “‘권한이 없어 무죄’라는 법리는 직권남용죄 존재 의의를 날려버리는 행위고 법원은 직권남용죄의 사각지대에 두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앞선 재판에서 ‘재판거래’의 사실관계가 드러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사건도 마찬가지다. 법원행정처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재상고심과 관련해 청와대-외교부-김앤장법률사무소(일본 기업 쪽 대리)와 협의 채널을 가동한 사실은 이미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인정된 바 있다. 하지만 임 전 차장 재판부는 김앤장 변호사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임 전 차장이 김앤장에 외교부와의 협의 내용을 알려준 사실 자체를 입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임 전 차장이 김앤장 요청으로 한일 청구권협정 해석에 관한 헌법재판소 내부 자료 유출을 지시한 혐의는 유죄 판단을 받았다.

 ‘사법부를 위하여’…법 금지 행위도 위법성 조각

‘법 금지 행위’이지만 ‘사법부를 위한 일’이라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일종의 조직보위론도 등장했다. 임 전 차장은 비위법관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응하기 위해 법관과 가족의 개인정보를 영장판사에 제공한 혐의(개인정보보호법 위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직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를 영장판사 등에 전달한 행위는 개인정보보호법이 금지한 ‘누설’에 해당한다”면서도 “사법신뢰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정당한 목적”이 있어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이 ‘정운호 게이트’ 연루 판사의 구속영장청구서를 일선 법원에서 받아본 일도 사법행정업무로 둔갑했다. “직무상 비밀 엄수 의무를 부담하는 사람들”끼리 “업무상 필요”로 자료를 공유했을 뿐, “수사정보 유출과 수사방해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 무죄라는 것이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사법행정권자가 재판부와 재판자료로 소통하기 시작하면 재판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이제 사실상 검찰은 법원 내부 인사에 대해 수사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법원의 판단은 다른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공무상비밀누설 사건과 견주어 지나치게 관대한 편이다.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법은 고 이예람 중사 사건에서 가해자 영장 정보를 전익수 공군 법무실장에 유출한 국방부 군무원에게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때 재판부는 ‘수사 방해가 초래되지 않았다’는 피고인 주장에 대해 “공무상비밀누설죄는 비밀 그 자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의 비밀 누설로 위협받는 국가 기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실제 수사기능에 장애가 초래됐는지와 무관하게 죄가 성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비위가 드러난 법관이 스스로 퇴직할 때까지 감사 등 조처를 미룬 행위도 ‘사법부를 위한 일’이 됐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이 비위법관에 대한 감사 등의 추가 조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직무유기 혐의로도 기소했는데 법원은 “법원의 신뢰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고려가 비위법관에 대한 비리혐의 조사 등의 가치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합리적 재량의 범위 내의 행위”로 판단했다.

헌법상 권리 침해했는데 ‘예규 지키기 위해’ 면죄부

사법농단 사태를 촉발한 ‘판사 사찰’ 역시 “형사처벌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법원 판단이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사법행정에 비판적 의견을 낸 법관의 사찰을 지시한 행위를 “적절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형사처벌 사유에 해당하는 위법성을 띤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방안을 검토한 행위도 무죄였다. 앞선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는 이를 ‘법관의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인정했는데, 이번 재판부는 ‘중복가입금지 예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직무수행이라고 판단했다. 헌법상 기본권 침해 문제가 관료주의적 이유로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유죄가 인정된 임 전 차장의 10개의 혐의도 하나하나 ‘사법부 독립’을 해친 중대한 범죄행위였지만, 법원은 ‘사법농단’이 허울뿐인 사건이라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재판부는 양형이유에서 “수사 초기 언론을 통해 국민 뇌리에 깊이 각인됐던 ‘사법농단’이나 ‘재판거래’에 관한 중대한 의혹들은 수많은 검사가 투입된 수사가 이뤄지는 동안 대부분의 실체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법원이 앞장서서 ‘사법농단’ 사태의 중대성을 축소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법센터는 논평을 통해 “1심 법원이 성립을 인정한 (임 전 차장의) 범죄행위는 결코 가벼운 행위라고 할 수 없다”며 “이번 1심 판단은 ‘사법농단’의 의미를 축소하고 제 식구에게 관대한 양형을 정했다고 자인한 것과 다름없다”고 밝혔다.  < 이지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