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크리스천의 자존심- 국가 기도회 및 Jesus in the city Parade)

 

박웅희 <새빛장로교회 담임목사>

Jesus in the city Parade 준비위원장

 

사람이 살아가는데 프라이드(pride), 즉 자존심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존심에 따라 직업도 갖게 되고 그 자존심을 따라 도전하는 자로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존심은 자기 인생의 가치관이며 목적이며 비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가진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그어놓은 선이 희미해져서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분명한 인생의 가치관, 세계관, 종말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와의 구별이 쉽지 않음을 주변에서 많이 느끼게 됩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진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진실함과 선한 양심을 따라 생활하면서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올바른 분별력과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옳은 것을 붙잡고 핍박도 각오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대단한 신앙의 연합과 응집력으로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신앙인의 분별력이 갈수록 흐릿해지고 세상적 불의에 타협하는 풍조로 인해 우리 주변에 정체성을 잃고 공의에 도전하는 타락상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프라이드를 비웃듯 벌어지는 도심의 ‘Pride 행사’가 바로 그런 사례의 하나입니다.

한국 등에서는 ‘퀴어축제’라고 하고 캐나다에서는 ‘Pride Parade’라고 하여 매년 6월 말이면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성적 소수 성애자들이 거리 행진을 합니다. Parade 참여를 위하여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많은 경비를 쏟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어 자신의 정체성이 떳떳한 양 자부심을 드러내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신앙인의 양심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때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뜻을 모아 중보하기 시작한 것이 국가기도회이고, 미스바 광장에 모여 찬양의 함성을 외치게 된 것이 십자가 예수 대행진입니다.

우리가 불씨를 당긴 국가기도회는 이번에 11회로 모이게 되고, 다운타운 Queens Park에서 출발하는 대행진 ‘Jesus in the city Parade’는 올해 25회로 열리게 됩니다.

한인 교회뿐 아니라 각 나라 다민족 교회들이 참가하여 토론토와 캐나다를 위하여 회개하며 합심 기도한 후에 거리 행진을 하고 전도와 함께 여러 행사를 합니다. 예수대행진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많지 않은 행사로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토론토에서 정식으로 허락된 귀한 행사입니다.

작년에 20여명의 목회자들과 대부분이 중소형인 교회 성도들이 참여하여 뜻깊은 행사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에는 가입한 회원교회가 170여개나 됩니다. 토론토와 온타리오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교회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9월3일 오후 6시 소망교회에서 열릴 ‘캐나다 국가 기도회’와 9월7일 정오 퀸즈파크에서 시작될 ‘Jesus in the City Parade’에 성도 여러분들과 교회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토론토에 살게 하시고 한인교회 멤버로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용기있게 동참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생명이시고 자존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개인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이 도시의 왕이시며 주인임을 선포하면서 행진할 때에,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교회를 찾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많은 성도들의 참여와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시/류/정/론/ 

‘친일-숭일’ 이 활개- 민족의 치욕 망각했나!

역사부정 맞서 제2 독립 횃불을!

 

 

광복절이 두 쪽으로 갈리고, 사방에서 친일과 숭일의 괴성을 질러댄다. 전국각지에서 꼴뚜기처럼 설치니 해외에서도 망둥이 뛰듯이 부화뇌동들을 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역사 퇴행이 참담하다.

오호 통재라! 어찌 이 나라의 자존이 이렇게까지 무너지고, 민족의 긍지가 이처럼 짓밟히게 되었는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던 일본 사도광산이 ‘강제’가 ‘자발’로 둔갑했음에도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에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역사 세탁을 하는 데 발견한 완벽한 공범”이라는 내용의 글이 실렸겠는가. 현 정권의 망국적 대일외교 현실을 보여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이 5년 뒤 나라의 주권마저 빼앗긴 비극의 역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일본 극우세력이 식민지배나 침략전쟁과 관련된 각종 범죄를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내세우는 역사수정주의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 역사부정 세력이 발호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다. 이들은 ‘뉴라이트’라 자처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신우익’ 정도일 텐데 사실은 친일 극우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 이후 세를 넓혀나가다가 윤석열 정권에서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정부 곳곳에 친일극우세력이 똬리를 틀고 역사쿠데타를 벌이는 중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마침내 독립기념관장 자리마저 ‘친일파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인물이 점령했다. 그리고 광복회장을 ‘일본 극우의 기쁨조’라고 매도했다. 친일을 나무라는 독립지사의 후손을 ‘기쁨조’라니, 실제로 일본 극우와 일심동체가 되어버린 자신들을 빗댄 고백이 아닌가.

독립기념관이 친일기념관이 됐고, 3·1절과 광복절은 ‘친일절’이 됐다고 탄식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10대 조선총독’이고 용산대통령실은 ‘용산총독부’라는 비아냥도 널리 퍼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취임 이후 한·일간 과거사 현안은 거의 ‘일본 마음’대로 지워지고 있다.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고 조선인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강변하며 반성도 사과도 왜 하느냐는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원전 핵오염수 방류를 변호해주고, 욱일기를 단 자위대와 합동훈련에 열심을 다하면서 우리 땅 독도를 ‘분쟁지’로 만들어 영유권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 수십만과 명성황후를 학살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 역사를 진정으로 반성한 적이 없다. 요사이는 군국주의 부활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일본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식민지배는 불법’이며 3.1운동 정신과 임시정부 법통을 규정한 헌법의 근본정신을 깔아 뭉개고 있다. 민족정신을 오염시키고, 국정의 피폐에 지친 국민들을 피곤하고 화나게 한다. 사태가 심각한 지경인데도 정권 내부는 물론이고 소위 레거시 언론조차 ‘꿀벙어리’가 되어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러다가 대한제국이 그랬듯이 고유의 영토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 주권을 포기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로 돌아가는 불행이 현실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선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훈계했다. 우리가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두 눈 부릅뜨고 매국적인 친일정권과 역사부정 세력의 행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민족 정기를 말살하는 비굴한 정권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우리 땅에 역사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는 그날까지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야흐로 국내외 온 동포들이 제2의 독립운동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릴 때다.               < 고걸 칼럼니스트 >

[삶과 글] 밀레니엄 세대의 육아 모습

● 칼럼 2024. 8. 10. 08:3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임순숙 에세이 - 삶과 글]  밀레니엄 세대의 육아 모습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상큼한 아침햇살을 가르며 아들이 손주와 함께 들어섰다. 아이는 나를 보자 두 팔을 한껏 벌리며 온몸으로 안겨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겨우 엄마, 아빠뿐이건만 사랑스런 표정과 큰 몸짓으로 찐한 애정을 표현하니 세상에 이 보다 더한 감동이 또 있을까 싶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참석하는 유아 놀이방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부자는 선뜻 찾아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긴다. 느긋했던 아침이 아이의 출현으로 갑자기 분주해지며 녀석의 뒤를 쫒는 우리들 이마엔 이내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재택근무를 하는 아들이 본격 업무에 들어가기 전 몇 시간 육아를 담당하는  사이 어미는 그 시간을 활용하여 하루를 준비하는 일정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부부가 함께 양육하는 모습이 생경하지만 아이에겐 더 없이 좋은 여건이니 복 많은 녀석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고 했다. 나는 아들 내외의 육아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삼 이 말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신생아 때부터 지, 덕, 체를 겸비한 아이로 키우고자 열과 성을 다 하는 그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가끔 예전의 육아 방법과 혼동하기도 하고 좀 지나치다 싶은 부분도 있어 마음이 짠 할 때도 있지만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볼 뿐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들의 육아 모습을 보면서 기함했던 때는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때 였다. 먹고 자기를 무한 반복하는 아기를 일정한 시간에 먹이고 재우는 습관을 들이느라 고생하던 모습에서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련만, 젊은 부모는 아이의 생활 습관은 빠를수록 좋다는 지론으로 무리 없이 다음, 그 다음 단계로 이어 간다.

우리 세대의 육아법은 약간의 육아 이론을 바탕으로 어른들의 경험을 많이 참고 한데 비해 지금 세대는 다양한 이론을 골고루 섭렵한 후 SNS 를 통해 비슷한 연령층의 다수와 소통하며 궁금증을 해결해 가는 모습이다. 가끔은 만남을 가져 아이의 사회성을 깨우쳐주기도 하고 도서관, 체육시설, 놀이방, 농장 견학 등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하게 하는 열정은 상상 그 이상이다. 비록 인지 능력은 아직 미진해도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겠기에 기회가 되면 열심히 동참한다.

최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육아법이 정반대여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이해시키려는 토론의 장이 열렸었다.

다양한 장난감 중에서 유난히 자동차를 좋아하는 손주를 유심히 관찰한 할아버지는 어느 날 노란 스쿨버스를 사다 주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받아 쥔 아이는 스쿨버스를 굴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며느리가 조용히 제안을 했다. ‘사오신 스쿨버스를 감춰놓았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꺼내주시면 좋겠다’고.  이유인즉, 연령에 비해 장난감이 많은 편이며 하나하나 집중해서 놀기에 충분하다는 견해였다. 이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어릴수록 다양한 장난감을 접해야 잠재된 뇌기능이 활성화 되고 탐구력 또한 발달 한다고 했다.

나는 상반된 의견을 들으면서 물자 풍요의 시대에 사는 아이에게 귀함까지 가르치려는 며느리의 교육관에 한 표 던졌다.

어른들의 마음을 알리 없는 아이는 오늘도 노란 스쿨버스를 부르릉 거리며 신나게 논다.

이제 17개월 된 아이를 보며 어른들은 매일 매일 다양한 꿈을 꾼다.

그래서 아이는 꿈나무인 모양이다.

[편집인 칼럼] 참 광복을 가로막는 원흉들

● 칼럼 2024. 8. 10. 08:3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한마당]  참 광복을 가로막는 원흉들

 

다시 광복절을 맞는다. 빛을 되찾은 날-, 그러나 눈부시게 빛나야 할 민족의 광영(光榮)은 언제일지, 지구가 태양을 79번이나 돌았는데도 여전히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우리들 가슴을 짓누른다. 삼천리 온 산하를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런 흑암의 구름이 마치 놀부의 심술처럼 덮고 있다. 과연 우리가 간절히 열망하는 진짜 눈부신 광명천지는 얼마나 더 참고 부대끼고 씨름하고 쏟아내야 그 소원의 문이 활짝 열린단 말인가.

돌아보면 어둠의 본체인 일제의 패망이 남의 손으로 이뤄진 탓이기도 하다. 그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여한을 남기며 미완의 광복시대를 시작한 민족의 비운이다. 기를 쓰고 ‘참 광복’의 길을 가로막아 선 질긴 악연들, 그 방벽들을 혁파하여 떨쳐내지 않는다면 우린 언제까지고 먹구름 낀 세상을 탄식하며 가야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다시 캄캄한 암흑의 세력 손아귀로 되돌아 갈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광복을 생각할 때, 나는 이 땅의 참 광복을 훼방하는 최악의 암적존재, 곧 원흉은 당연히 우리들 내부의 친일족(親日族)이라고 단정한다. 일제치하 악행을 참회하지도 않고 광복 후에도 독립투사들을 괴롭힌 악질형사들과 같은 부류들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국과 자파의 이기(利己)로 분단국의 핸디캡과 지정학적 유불리 악용에만 관심이 있는 안팎의 권력집단과 호전세력 및 강국들이 두 번째요, 거기에 빌붙어 이념과 색깔로 갈라치기와 덧씌우기를 즐기는 공존거부, 상생 거부의 무리들이 세 번째이며, 절대로 반성없이 제국의 망령에 매달려 사는 일본 극우세력이 그 뒤를 이어 포진해 있다고 여긴다.

참 광복의 길은 무엇보다 국민이 주인인 진실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완성과 민족 자존으로 하나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믿기에 그렇다.

광복회는 며칠 전 격앙된 성명을 냈다. 항일운동과 대한독립의 상징인 독립기념관 이사진을, 일제 찬양 ‘뉴라이트’인사들이 장악하고 관장까지 차지할 위기라는 격노의 항의였다. 하지만 정부는 들은체 만체 임명을 강행했다. ‘군대위안부’의 강제성에 대해 “논쟁적 사안”이라고 얼버무린 부적격 인물도 다른 장관들처럼 서둘러 기용했다. 이례적으로 국회의장이 호통을 쳐서 알려진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의 이면에는 ‘강제노동’ 지우기를 묵인하고 동조한 굴욕적 외교가 있었다.

일본을 대변하다 못해 일본인의 짓인지, 일본정부가 아닌지 의심케 하는 한국인과 한국정부의 수많은 언동들이 친일족의 발호 때문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요즘 잇달아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소식들에서 친일족이 얼마나 반 민족, 반 광복적 존재들인지를 실감케 한다.

분단을 만들어 내고 고착시켜 대립과 갈등을 즐기는 주변 열강의 이기적인 행태와 그에 굴종·영합하는 정통성 없는 권력과 반통일 세력들 역시 설명이 필요없는 엄연한 실체다. 또한 이념과 색깔팔이 족들의 음흉한 속셈도 늘 보아온 구태요 적폐인 반 광복 무리의 하나다.

일본에 처음 등장한 사회당 출신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하얀 눈썹이 인상적인 촌티나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광복 50년의 해인 1995년, 일본으로는 ‘8.15 종전 기념일’에 그는 “침략과 사죄”를 처음 언급해 평가받은 역사적인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특파원으로 그의 담화를 직접 들었던 필자는 총리실을 나오면서 무라야마를 맹비난하는 우익들의 확성기 시위를 보고 담화의 수명이 얼마나 길까 의구심이 났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의 자민당 정권은 ‘담화 탈색’을 계속했고, 아베 신조에 이르러서는 거의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과거사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뻔뻔한 당당함이다. 군대위안부와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욱일기를 고집하여 부산에 입항하는가 하면 독도를 내놓으라고 큰 소리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과 수교에 열을 올리고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오늘의 일본.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상할까 전전긍긍하는 현 한국정부의 비굴에서, 참 광복을 훼방하는 극우의 ‘파묘’ 악령을 본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 광복은 자주적 정체성을 가진 국민이 주인인 나라, 진실되고 공의로운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동서 남북이 하나되어 통일과 번영을 이룰 때 비로소 구가할 수 있는 8천만 한민족의 비전이다. 그 절실한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김종천 핀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