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며 참으로 씁쓸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초등학교 교과서 한자 병기를 포함시키려 하자, 한글·교육단체 등이 격렬한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13일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진 서울 광화문 등지에서 ‘한글 교과서 장례식’까지 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한글 전용 정책을 바꾸려면 이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만한 폐해가 입증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를 비롯해 한자 병기를 지지하는 쪽은 전혀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한자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들의 뜻 이해가 부족해 독해력이 떨어진다는 정도다. 그런데 국제학업성취도 평가 등을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성인의 독해력은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한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은 본말이 뒤바뀌었다. 한자 어원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말을 살리고 다듬어 한자 어원에서 자유로운 어휘를 살찌우는 일이다. 정부가 이런 노력은 하지 않고 한글을 반쪽짜리 문자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영어권 나라에서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라틴어를 병기하자고 하면 얼마나 우습게 들리겠는가.


더욱이 디지털 혁명을 거치면서 한글은 서구의 알파벳과 어깨를 견주는 우수한 문자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다. 반대로 한자는 중국에서조차 버림받고 최대한 단순화한 간체자로 대체된 상황이다. 창조경제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이 정부에서 디지털 시대를 거스르는 문자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한자가 우리 전통문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외국어로서 배울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중등 과정에서 교양 차원으로 가르치면 충분하다. 한자 병기는 가뜩이나 학습 부담에 찌든 초등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일이다. 이미 한 해 수십만명의 초등학생이 한자자격시험을 보는 상황에서 교과서 한자 병기가 불러올 사교육 급증도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광복 70년을 맞아 민족 자긍심을 한껏 고취해야 할 시점에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글이 이처럼 수모를 당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승만·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됐고 ‘건국 이래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는 한글 전용을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은 이 정부의 혼란스런 역사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