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한국 총선, 왜 걱정하나?

● 칼럼 2024. 3. 17. 08: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한마당]  한국 총선, 왜 걱정하나?

 

 

요즘 유튜브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한국의 4.10 총선관련 이슈가 많이 나돈다. 재외선거는 3월27일부터니까 이제 2주도 남지 않아 여야간 대립 격화속에 국내외적 관심도 그만큼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이번 총선이 정말 중요한 선거라고 이구동성 외친다. 잘못하면 한국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왜 그런가. 한마디로 우리 조국 한국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위태하고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바로 엊그제까지 놀랍게 빛을 발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평창올림픽과 남북 정상의 만남으로 평화 선도국임을 각인시켰고, 세계최고의 코로나 팬데믹 대처로 G8 예우를 받기도 했다, 영화와 음악, 문학 등 예술인들이 K-Culture를 과시했다. IT와 자동차, 선박에 방산 등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한국은 특히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명실공히 선진반열의 나라였다. 그게 한낱 신기루였단 말인가, 불과 2년도 안돼 곤두박질 쳐버렸다.

군사합의마저 파기한 남북은 ‘동족이 아닌 적국’이 되어 언제 미사일을 쏴댈지 불안하게 됐다. 이미 우크라 전선에서는 남북의 무기로 대리전이 벌어진 참이다. 무역적자에 경제가 동반추락해 기업과 가계의 신음이 가득하다. 압수수색을 남발하는 검찰이 대통령의 사조직처럼 국정을 지탱하며 야당과 언론, 시민사회의 입을 틀어막는 독재가 부활했다. 그래서 폭망정권, 검사독재, 입틀막 정권이라는 비판이 나돈다.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연구소는 최근 한국을 독재화가 진행중인 나라라고 공표했다.

해외에서도 한국 총선에 쏠린 관심은 대단하다. 결과에 따라 부정적 여파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본이나 미국은 물론, 유럽,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호주 등 직간접 연관과 관심을 가진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마 북한도 내심 주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현 정부에 가장 짭짤하게 득을 본 나라가 미·일이다. 한일간 오랜 앙금인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원전 핵폐수, 합동군사훈련, 중국·대만문제 공조와 우크라 지원, 기업유치와 투자 등등 한국을 맘껏 울궈먹으며 재미를 봤다. 이들은 마치 상전이나 된 것처럼 구는데, 중국은 만나주지도 않는다. 러시아는 사상 처음 한국인을 간첩죄로 구금했다. 윤 정부가 ‘매국적 굴종외교’ 비판을 듣는 이유다. 거기에 대통령과 부인의 스캔들, 이태원 참사와 잼보리 엉망 개최에, 범죄혐의자를 대사로 보낸 황당한 뉴스까지, 달갑지 않은 해외토픽 거리가 줄을 잇는다.

이번 22대 총선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들이다. 국민의 권리는 무시하면서 권력 주변의 부패비리는 덮고 없애는데 급급한 정권, 자국민에겐 매정하나 남의 나라에 친절하며 국익보다 타국을 위해 일하는 것 같은 비정상적이고 무책임한 정권의 폭주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민족의 앞날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모국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소중한 한 표를 용기와 지혜로 투표하자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토론토 총영사관 관내의 경우 3천100명, 캐나다 전체는 7천129명이 투표권자로 등재되는 등 전세계적으로는 영주권자 2만8천여명을 포함해 총 14만7900여명이 유권자로 확정됐다. 이들 중 실제 투표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2012년 19대 총선부터 시작된 재외선거는 대통령 선거 때만 70%이상의 투표율을 보였을 뿐, 총선은 19대 당시 45.7%, 20대 41.4%였고, 팬데믹 선거였던 21대는 23.8%에 그쳤다.

투표권을 가진 재외국민이 약 240만명이라고 할 때, 이번 총선 유권자 14만7900여명은 6.1%에 불과한데, 그 중에도 실제 투표 참여는 투표율을 50%로 높여 잡아도 8만명이 채 안돼 전체의 3~4% 밖에 안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재외선거가 실시되는 전세계 178개 공관 중 캐나다를 비롯한 22개 공관에는 재외선거관을 1년간 파견하는 등 막대한 국민 세금이 들어간다. 재외선거 1표에 대략 10만원 꼴로, 국내의 1표에 비해 평균 50배는 더 든다는 통계도 있다. 당연히 비효율적인 재외선거를 없애라는 무용론이 선거 때마다 비등하다. 재외국민의 겨우 3~4%만 관심을 갖는 선거가 무슨 도움이 되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일리있는 말이지만, 수많은 국적자가 해외에 나가있는 지구촌시대에 재외투표를 없애기는 사실상 어렵다. 선진 각국이 일부는 시민권자까지도 포함해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주는 이유가 왜 이겠는가. 이왕에, 그리고 존치해야 할 재외선거라면, 우리의 정치에 대한 관심, 참정권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봐야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이라고 간파한 것은 인간의 공동체적 삶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관심없다”는 말은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고 몰이해인 것이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가에 개개인이 영향을 받기도 하는 시대에 산다. 캐나다 집권당과 총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민정책이 바뀌고, 정치인들에 의해 세금과 그랜트 등이 달라지는 것도 잘 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가 한 때 211석을 얻어 역사적 다수집권을 자랑했는데, 부가세와 FTA에 반발해 돌아선 국민들 심판에 전국에서 단 2석만 얻는 참패로 당의 존재마저 사라졌던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다시 논해본다. 우리들 모국의 일은 그저 먼산의 불이고, 잘되든 못되든 나와 상관없는 일인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열렬히 성원한 해외동포들의 결기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 정체성의 맥박을 상기해 보자!. 영주권자든 시민권자든, 투표권이 있든 없든, 모국을 품고 걱정해야 할 우리들이다.